
zaobao: 写实的非写实 韩国女画家崔芝荣个展(2012-05-19)
写实的非写实 韩国女画家崔芝荣个展(2012-05-19)
自创现实与写实,崔芝荣的绘画,采用的是设置出来的场景。
吴启基/报道 李白娟/摄影
我们在看画时,常很简单地根据画面所表现的物件或形象,分成写实和非写实两大类别。可是,面对韩国青年女画家崔芝荣的作品,只从作品的外在来分,那些精心描绘的作品,更像是一幅幅的静物画,其中有:高高吊起的豪华灯饰、点燃的高脚烛台、灯盏灯饰、窗廉和水喉浴盆,而且都是和我们非常接近的日常所见之物。要命的是,面对那样美好的构图和画面设计,我们会把她的画,误为摄影作品。
也可以这样说,崔芝荣的作品是写实的非写实。她的创作是写实的一种提升改变。画家把自己的作品,形容成“海市蜃楼”的创造。也即在现实写实之外自创现实与写实。如果所表现的物件真是存在于现实环境里的,它们必然充满生活环境中的尘埃,和许多不安不洁的污染,崔芝荣对此有洁癖,她的作品也显得格外宁静,格外清洁。
设置出来的场景
她说,为了制造更好更多的现实与写实,她采用的是设置出来的场景。奇怪的是,很多物件却是古董,甚至那些道具还有巴洛克(Baroque)风格的繁复夸饰、富丽堂皇、气势宏大、富于动感等艺术特色。
她喜欢画睡床,那些被分散开来处理的大小被褥枕头,很随意地由下到上排列,由于背景是完全的黑色,在光线照耀下,好像是埋葬在黑夜中的某种形体。有人理解它是“死亡”的象征,也有人说,睡觉就是死亡的同义词,再加上巴洛克的写实描绘,整个画面是非常深沉的进入睡眠状态。
她的另一拿手好戏是表现金光银光闪闪的枝形吊灯,黄铜、陶瓷、水晶等材料所制成的吊灯,高高悬于天花板上,具有两个或以上光源的灯臂。有一件还六灯齐现,每一盏灯好像是金玉缀满的灯笼。多幅蜡烛齐放光明的作品,有周围黑沉沉的一片背景,更能显示烛火的宁静光芒。
以黑色和蓝色为背景
崔芝荣喜欢采用黑色和蓝色为背景作画。她的作画方法也特别,首先,她是把自己关闭在一间画室内,作画时间是在晚上。她说:“我通常是一幅作品完成了,再进行其他作品。那是因为,黑色油彩在干掉之前,我必须把画面上的背景颜色全部去掉、减少,10天只能完成一件作品。”
她采用的背景颜色有黑色和蓝色两种。前一种颜色用来表现一批有灯光光线的作品;后一种表现浴缸题材,浴缸以白瓷为材质,冷光是其特色。
●崔芝荣画展已开始,将展至5月27日/上午11时至晚上7时(星期一至星期六)/地点:Art Seasons画廊( 1 Selegie Road, PoMo)
http://www.zaobao.com/
自创现实与写实,崔芝荣的绘画,采用的是设置出来的场景。
吴启基/报道 李白娟/摄影
我们在看画时,常很简单地根据画面所表现的物件或形象,分成写实和非写实两大类别。可是,面对韩国青年女画家崔芝荣的作品,只从作品的外在来分,那些精心描绘的作品,更像是一幅幅的静物画,其中有:高高吊起的豪华灯饰、点燃的高脚烛台、灯盏灯饰、窗廉和水喉浴盆,而且都是和我们非常接近的日常所见之物。要命的是,面对那样美好的构图和画面设计,我们会把她的画,误为摄影作品。
也可以这样说,崔芝荣的作品是写实的非写实。她的创作是写实的一种提升改变。画家把自己的作品,形容成“海市蜃楼”的创造。也即在现实写实之外自创现实与写实。如果所表现的物件真是存在于现实环境里的,它们必然充满生活环境中的尘埃,和许多不安不洁的污染,崔芝荣对此有洁癖,她的作品也显得格外宁静,格外清洁。
设置出来的场景
她说,为了制造更好更多的现实与写实,她采用的是设置出来的场景。奇怪的是,很多物件却是古董,甚至那些道具还有巴洛克(Baroque)风格的繁复夸饰、富丽堂皇、气势宏大、富于动感等艺术特色。
她喜欢画睡床,那些被分散开来处理的大小被褥枕头,很随意地由下到上排列,由于背景是完全的黑色,在光线照耀下,好像是埋葬在黑夜中的某种形体。有人理解它是“死亡”的象征,也有人说,睡觉就是死亡的同义词,再加上巴洛克的写实描绘,整个画面是非常深沉的进入睡眠状态。
她的另一拿手好戏是表现金光银光闪闪的枝形吊灯,黄铜、陶瓷、水晶等材料所制成的吊灯,高高悬于天花板上,具有两个或以上光源的灯臂。有一件还六灯齐现,每一盏灯好像是金玉缀满的灯笼。多幅蜡烛齐放光明的作品,有周围黑沉沉的一片背景,更能显示烛火的宁静光芒。
以黑色和蓝色为背景
崔芝荣喜欢采用黑色和蓝色为背景作画。她的作画方法也特别,首先,她是把自己关闭在一间画室内,作画时间是在晚上。她说:“我通常是一幅作品完成了,再进行其他作品。那是因为,黑色油彩在干掉之前,我必须把画面上的背景颜色全部去掉、减少,10天只能完成一件作品。”
她采用的背景颜色有黑色和蓝色两种。前一种颜色用来表现一批有灯光光线的作品;后一种表现浴缸题材,浴缸以白瓷为材质,冷光是其特色。
●崔芝荣画展已开始,将展至5月27日/上午11时至晚上7时(星期一至星期六)/地点:Art Seasons画廊( 1 Selegie Road, PoMo)
http://www.zaobao.com/
The monthly art magazine PUBLIC ART new artists 2011
038 close up - 2011 Public Art New Hero!_편집부
08
최 지 영 (Choi, ji-young)
나는 원한다, 고로 존재한다
최지영의 작업은 사적 공간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욕조, 샹젤리제, 촛대 등 귀족적인 성향이 묻어나는 오브제를 그녀의 가장 집약적인 사적 공간인 캔버스에 채워 넣는다. 유화로 표현한 이 오브제들은 농밀한 물기를 머금고 캔버스 위에 궁굴고 있다. 빛을 반사하는 텅 빈 욕조의 표면, 어둠을 밝히는 샹젤리제는 관객을 고요하게 응시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즐긴다. 그러나 이렇게 관능미가 뚝뚝 떨어지는 표현 기법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무채색 계열의 모노톤으로 캔버스의 배경색을 지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로 정적이고 검소한 느낌의 색채는 욕망에 관한 패티쉬를 중화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로, 이런 상쇄적인 기법은 현실에서는 소유할 수 없는 갈망의 박탈감을 위로하는 작가의 심리를 투영한다. 그녀는 꽉 찬 색채를 지워나가며 오브제의 형태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그녀가 투영한 욕망을 하나씩 벗겨낸다.
개인적인 욕망의 투영으로 시작한 그녀의 작품은 그러나 결국은 관람하는 이를 향한 위로로 종착한다. 그녀가 앞으로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룰 대상인 ‘욕조’는, 사람들이 가장 무방비한 상태로 심신을 위로받고자 몸을 누이는 곳이다. 욕망으로 점철된 허물을 벗어내고 태아와 같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 이곳에서 그녀와 타인이 욕망의 하강을 경험하고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란다.
http://www.artinpost.co.kr/bbs/view.php?id=closeup&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5
08
최 지 영 (Choi, ji-young)
나는 원한다, 고로 존재한다
최지영의 작업은 사적 공간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욕조, 샹젤리제, 촛대 등 귀족적인 성향이 묻어나는 오브제를 그녀의 가장 집약적인 사적 공간인 캔버스에 채워 넣는다. 유화로 표현한 이 오브제들은 농밀한 물기를 머금고 캔버스 위에 궁굴고 있다. 빛을 반사하는 텅 빈 욕조의 표면, 어둠을 밝히는 샹젤리제는 관객을 고요하게 응시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즐긴다. 그러나 이렇게 관능미가 뚝뚝 떨어지는 표현 기법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무채색 계열의 모노톤으로 캔버스의 배경색을 지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로 정적이고 검소한 느낌의 색채는 욕망에 관한 패티쉬를 중화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로, 이런 상쇄적인 기법은 현실에서는 소유할 수 없는 갈망의 박탈감을 위로하는 작가의 심리를 투영한다. 그녀는 꽉 찬 색채를 지워나가며 오브제의 형태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그녀가 투영한 욕망을 하나씩 벗겨낸다.
개인적인 욕망의 투영으로 시작한 그녀의 작품은 그러나 결국은 관람하는 이를 향한 위로로 종착한다. 그녀가 앞으로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룰 대상인 ‘욕조’는, 사람들이 가장 무방비한 상태로 심신을 위로받고자 몸을 누이는 곳이다. 욕망으로 점철된 허물을 벗어내고 태아와 같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 이곳에서 그녀와 타인이 욕망의 하강을 경험하고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란다.
http://www.artinpost.co.kr/bbs/view.php?id=closeup&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5
Priors. Gallery Interview : 2010 June
최지영 오상택 2인전 fashion or passion 2010. 0615 - 0709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내 인생의 한 부분
Q> 먼저 작가가 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요?
A> 수채화 물감의 번지는 모습을 아주 매력적으로 느꼈습니다. 이 후 막연히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미대 진학을 하게 되었고 신진작가 공모 프로그램에서의 선정이 졸업 후에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죠.
내게 있어 그림은 나만의 치유 과정
Q>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오브제인 침대, 샹들리에, 욕조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면?
A> 저는 간절하게 바라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강한 욕망에서 출발하여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간절함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고, 또 함께 하고 싶은 대상들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합니다. 침대, 샹들리에, 욕조 등은 단순히 집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안락한 사적 공간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리물로써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그토록 소유하고 싶은 사물들이 차갑고 외롭게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실제로는 그들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감성을 표현하기위해서 색의 선택은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검은색과 푸른색 2가지 색을 주로 사용하여 모노크롬(monochrome:단색)으로 표현됩니다. 검정에 가까운 색채는 금욕, 절제, 죽음, 고요함과 무한함을 담고 있지요. 또한 욕조시리즈에서 사용하였던 푸른색은 욕실 가득한 습기, 물의 이미지, 우울하고 차분한 감정들이 어우러져 슬프면서도 냉정한 느낌이 드는 색채이지요. 검정과 푸른색을 지워낸 후 드러난 자리는 흰색에 가깝습니다. 감정을 지워낸 ‘텅 빈’자리이죠, 감정을 위로하는 진정제 같은 느낌이듭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배제한 사물들을 표현하면서 이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표현을 하고자했습니다.
단순히 ““그린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다른 그림
Q> 작업의 표현방식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A> 그렇습니다. 지워내면서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현과정은 앞서 말씀드린 작품의 의미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그린 침대나 욕실, 샹들리에를 보시고는 하얀 색깔의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그렸다고 생각을 하십니다. 또는 사진작업이거나 극사실화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제 작업은 단색으로 배경을 두껍게 칠한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기름을 적신 붓으로 캔버스의 표면을 닦아내면서 형태와 깊이를 완성합니다. 물감을 기름으로 많이 지워내면 지워낼수록, 캔버스 바탕의 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대상은 실제와 닮은 허상일 뿐이므로 따로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하지 않고 곧바로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지워내며 사물을 재현합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한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작품이 시작되면 작품 곁을 떠나지 않고 집중해서 작업을 하지요.
두꺼운 배경색을 기름의 붓질로 지워가면서 표현하는 방식은 화려하고 세속적인 물성에 대해 가지는 현대인의 욕망, 그것들의 절제와 조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치유 과정의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제품의 형태적 라인이 살아있지 않고 필연적으로 뭉겨져서 드러나고 흘러내리기도 하는 저의 표현방식이 이런 세속적인 소재들에 대한 무상함과 허무함 등을 표현하는 저만의 방식이라고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기름이 가지는 의의
Q> 작가의 작품 속에서 욕망의 제거 기능을 하는 ‘기름’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A> 변형의 기대감이 있습니다. 기름은 건조되는 최소 3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공기로 마나 끊임없이 캔버스 위를 움직이면서 교감과 반응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작업을 완성하고 붓을 놓았을 당시의 느낌과 수 개월이 지난 후에 작품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차이가 나지요. 심지어 색감도 변합니다. 그 부분이 제겐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http://www.priors.co.kr/
http://www.priors.co.kr/customer/notice_view.php?sq=88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내 인생의 한 부분
Q> 먼저 작가가 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요?
A> 수채화 물감의 번지는 모습을 아주 매력적으로 느꼈습니다. 이 후 막연히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미대 진학을 하게 되었고 신진작가 공모 프로그램에서의 선정이 졸업 후에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죠.
내게 있어 그림은 나만의 치유 과정
Q>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오브제인 침대, 샹들리에, 욕조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면?
A> 저는 간절하게 바라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강한 욕망에서 출발하여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간절함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고, 또 함께 하고 싶은 대상들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합니다. 침대, 샹들리에, 욕조 등은 단순히 집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안락한 사적 공간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리물로써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그토록 소유하고 싶은 사물들이 차갑고 외롭게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실제로는 그들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감성을 표현하기위해서 색의 선택은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검은색과 푸른색 2가지 색을 주로 사용하여 모노크롬(monochrome:단색)으로 표현됩니다. 검정에 가까운 색채는 금욕, 절제, 죽음, 고요함과 무한함을 담고 있지요. 또한 욕조시리즈에서 사용하였던 푸른색은 욕실 가득한 습기, 물의 이미지, 우울하고 차분한 감정들이 어우러져 슬프면서도 냉정한 느낌이 드는 색채이지요. 검정과 푸른색을 지워낸 후 드러난 자리는 흰색에 가깝습니다. 감정을 지워낸 ‘텅 빈’자리이죠, 감정을 위로하는 진정제 같은 느낌이듭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배제한 사물들을 표현하면서 이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표현을 하고자했습니다.
단순히 ““그린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다른 그림
Q> 작업의 표현방식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A> 그렇습니다. 지워내면서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현과정은 앞서 말씀드린 작품의 의미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그린 침대나 욕실, 샹들리에를 보시고는 하얀 색깔의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그렸다고 생각을 하십니다. 또는 사진작업이거나 극사실화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제 작업은 단색으로 배경을 두껍게 칠한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기름을 적신 붓으로 캔버스의 표면을 닦아내면서 형태와 깊이를 완성합니다. 물감을 기름으로 많이 지워내면 지워낼수록, 캔버스 바탕의 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대상은 실제와 닮은 허상일 뿐이므로 따로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하지 않고 곧바로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지워내며 사물을 재현합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한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작품이 시작되면 작품 곁을 떠나지 않고 집중해서 작업을 하지요.
두꺼운 배경색을 기름의 붓질로 지워가면서 표현하는 방식은 화려하고 세속적인 물성에 대해 가지는 현대인의 욕망, 그것들의 절제와 조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치유 과정의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제품의 형태적 라인이 살아있지 않고 필연적으로 뭉겨져서 드러나고 흘러내리기도 하는 저의 표현방식이 이런 세속적인 소재들에 대한 무상함과 허무함 등을 표현하는 저만의 방식이라고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기름이 가지는 의의
Q> 작가의 작품 속에서 욕망의 제거 기능을 하는 ‘기름’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A> 변형의 기대감이 있습니다. 기름은 건조되는 최소 3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공기로 마나 끊임없이 캔버스 위를 움직이면서 교감과 반응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작업을 완성하고 붓을 놓았을 당시의 느낌과 수 개월이 지난 후에 작품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차이가 나지요. 심지어 색감도 변합니다. 그 부분이 제겐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http://www.priors.co.kr/
http://www.priors.co.kr/customer/notice_view.php?sq=88
주간한국> 화가 최지영, 미술계를 매혹하는 '욕망의 붓'
주간한국 >피플 [문화계 앙팡테리블] (10)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 사진=임재범 기자 happyyjb@hk.co.kr
화가 최지영, 미술계를 매혹하는 '욕망의 붓'
GanaNowArt 수상·금호 영아티스트 선정과 두차례 개인전으로 주목
우아한 곡선과 희끄무레한 빛으로 그려진 샹들리에와 욕조, 로코코풍 침대와 찻잔… 최지영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그 사물들의 몽롱한 질감이다.
순정만화를 읽던 시절에 한번쯤 꿈꾸어 본 아름다운 삶의 형상과, 그런 삶에 대한 욕망이 제법 어른이 된 우리 안에 꼭 저렇게 남아 있다.
저 사물들의 본질은 환영(illusion)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작동하는 매혹의 메커니즘은 실재(the real)다. 평론가 강수미는 최지영의 그림에 대해 "스스로를 화면 위로 내세우는 성스럽고 유혹적인 주인공-사물들이 우리를 욕망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단지 소유욕이 아니다.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쾌락 충동을 좇고자 하는 욕망에 가깝다.
그래서 최지영의 그림 앞에서는 어쩐지 무기력해진다. 이 그림이 추동하는 묵직한 감정이 단지 저 샹들리에와 욕조, 로코코풍 침대와 찻잔을 가짐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이 표상들은 겨우 우리 욕망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겨우 이런 사물들에 기대어 아름다움을 꿈꾼다.
순수한 탐미의 순간이 이런 것일까.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들끓되 또 그 아름다움의 한계에 먹먹하고 그래서 어느새 안타깝게 제 은밀한 욕망에 젖어 드는 순간, 최지영의 그림 앞에 서 있는 순간 말이다.
"결핍에서 시작됐죠." 최지영이 이 그림들을 그린 동력은 사적 공간에 대한 갈망이었다. 대구에서 와 내내 하숙집 생활을 했던 대학교, 대학원 재학 시절의 서울살이 경험도 녹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 "이글이글하게"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차분하고 단정한 몇 가지 색만을 쓴 것은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 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의도가 보는 사람이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적이기에 풍요로운 그의 작품 세계는 미술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최지영은 2007년 가나아트갤러리가 주관한 GanaNowArt를 수상한 데 이어 금호미술관의 제5회 금호 영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작년 '연출된 장면' '2Nd 연출된 장면'이라는 타이틀로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는 가나아트갤러리의 '장흥 제2 아뜰리에'에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최지영에게 좀처럼 사적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던 서울을 떠나 장흥의 툭 트인 작업실로 갔다니 그의 결핍도, 욕망도 좀 누그러들지 않았을까.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니 좀 편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자유롭지는 않아요. 함께 입주한 작가들을 보면서 '성실함'이 예술가의 기본 요건임을 배웁니다."
두 차례의 개인전은 최지영에게 이름에 대한 책임감으로 남았다. 다음 전시에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생겼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런 엄격함이 무겁거나 폐쇄적인 풍경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다음에는 '연약한 색'을 쓰고 싶어요. 벨기에 작가 뤽 튀망의 작품을 보면 공기가 들락날락하는 여백이 느껴지는데 저도 그런 '여유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를 예술가이게 하는 결핍과 욕망은 이렇게 단련되어가는 중이다.
입력시간 : 2009-03-26 10:45:35 수정시간 : 2009/03/26 10:49:28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 사진=임재범 기자 happyyjb@hk.co.kr
화가 최지영, 미술계를 매혹하는 '욕망의 붓'
GanaNowArt 수상·금호 영아티스트 선정과 두차례 개인전으로 주목
우아한 곡선과 희끄무레한 빛으로 그려진 샹들리에와 욕조, 로코코풍 침대와 찻잔… 최지영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그 사물들의 몽롱한 질감이다.
순정만화를 읽던 시절에 한번쯤 꿈꾸어 본 아름다운 삶의 형상과, 그런 삶에 대한 욕망이 제법 어른이 된 우리 안에 꼭 저렇게 남아 있다.
저 사물들의 본질은 환영(illusion)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작동하는 매혹의 메커니즘은 실재(the real)다. 평론가 강수미는 최지영의 그림에 대해 "스스로를 화면 위로 내세우는 성스럽고 유혹적인 주인공-사물들이 우리를 욕망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단지 소유욕이 아니다.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쾌락 충동을 좇고자 하는 욕망에 가깝다.
그래서 최지영의 그림 앞에서는 어쩐지 무기력해진다. 이 그림이 추동하는 묵직한 감정이 단지 저 샹들리에와 욕조, 로코코풍 침대와 찻잔을 가짐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이 표상들은 겨우 우리 욕망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겨우 이런 사물들에 기대어 아름다움을 꿈꾼다.
순수한 탐미의 순간이 이런 것일까.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들끓되 또 그 아름다움의 한계에 먹먹하고 그래서 어느새 안타깝게 제 은밀한 욕망에 젖어 드는 순간, 최지영의 그림 앞에 서 있는 순간 말이다.
"결핍에서 시작됐죠." 최지영이 이 그림들을 그린 동력은 사적 공간에 대한 갈망이었다. 대구에서 와 내내 하숙집 생활을 했던 대학교, 대학원 재학 시절의 서울살이 경험도 녹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 "이글이글하게"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차분하고 단정한 몇 가지 색만을 쓴 것은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 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의도가 보는 사람이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적이기에 풍요로운 그의 작품 세계는 미술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최지영은 2007년 가나아트갤러리가 주관한 GanaNowArt를 수상한 데 이어 금호미술관의 제5회 금호 영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작년 '연출된 장면' '2Nd 연출된 장면'이라는 타이틀로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는 가나아트갤러리의 '장흥 제2 아뜰리에'에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최지영에게 좀처럼 사적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던 서울을 떠나 장흥의 툭 트인 작업실로 갔다니 그의 결핍도, 욕망도 좀 누그러들지 않았을까.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니 좀 편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자유롭지는 않아요. 함께 입주한 작가들을 보면서 '성실함'이 예술가의 기본 요건임을 배웁니다."
두 차례의 개인전은 최지영에게 이름에 대한 책임감으로 남았다. 다음 전시에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생겼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런 엄격함이 무겁거나 폐쇄적인 풍경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다음에는 '연약한 색'을 쓰고 싶어요. 벨기에 작가 뤽 튀망의 작품을 보면 공기가 들락날락하는 여백이 느껴지는데 저도 그런 '여유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를 예술가이게 하는 결핍과 욕망은 이렇게 단련되어가는 중이다.
입력시간 : 2009-03-26 10:45:35 수정시간 : 2009/03/26 10:49:28
Propose7 (vol.4) 금호미술관_ 죽음은 에로스처럼 속삭인다 _ 한창호/ 영화평론가
Propose7 (vol.4) : 2009. 8.26(수) ~ 9.20(일) : 금호미술관
죽음은 에로스처럼 속삭인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아마 관객은 최지영의 그림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소재와 색깔이 그런 기분을 자극한다. 길게 눕고 싶은 아늑한 침대, 지친 몸을 담그고 싶은 깊은 욕조, 그리고 눈을 부시게 하는 피곤한 빛으로부터 ‘어둠을 보호하는’ 은은한 촛불들까지. 그의 그림들은 우리를 적막과 고요의 세상으로 이끈다. 게다가 그림의 색깔은 울긋불긋하지 않고 단색의 모노톤이다. 모노톤의 어둠이 공간을 지배하고, 그 어둠 속에서 대상은 조그만 빛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살며시 드러낸다. 바로크 회화처럼 영혼을 위무하는 어둠이 회화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최지영의 그림들은 모두 정물로 갈래지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촛불’ ‘샹들리에’ ‘베개’ 등은 전형적인 정물들이고, ‘침대’ ‘소파’ ‘욕조’ 등도 넓은 의미의 정물에 속한다.
靜·物·. 글자 그대로 사물이 정지되어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정물화는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에 관한 그림들이다. 정지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속성 때문에 정물에는 늘 죽음의 고요함이 스며들어 있다. 바로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들이 발견한 정물의 매력이다. 정물화 가운데 가장 자주 다뤄지는 꽃을 상상해보라. 그렇게 아름답고 건강한 꽃도 며칠 후면 시들고 색도 변한다. 바로크 화가들은 꽃 한 송이에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허무함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고, 그런 역설적인 감정을 정물화 속에 표현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정물을 죽음의 은유로 표현하기를 더 좋아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명제를 바로크의 화가들은 꽃 한 송이로 대신했다. ‘메멘토 모리’, 곧 정물은 죽음이 된 것이다.
최지영의 작품들은 바로크의 귀환처럼 보인다. 그가 즐겨 그린 ‘침대’를 보자. 새까만 배경 속에 은은하게 드러나 있는 침대에서 바로크의 거장인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 갇혀 있고, 빛을 받은 침대는 마치 무덤처럼 기다랗게 누워 있다. 잠을 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의 은유이다. 바로크의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침대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을 영면의 시간을 유혹하고 있다.
그가 ‘침대’만큼 자주 그린 ‘푸른 욕조’는 또 어떤가? 그 속에 몸을 뉘고, 눈을 감고 있으면 나만 즐길 수 있는 절대고립의 평화가 가능할 것 같다. 쉰다는 것,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것, 물론 이것도 죽음의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욕조를 그린 그림들도 기본적으로는 정물이라고 본다. 게다가 욕조가 있는 그림들은 대개가 푸른색으로 표현돼 있다. 블루는 고독하고, 죽은 것 같은 차가운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이용되는 색깔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블루를 떠올려보라. 그의 블루에서 외로움은 어느덧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블루는 저쪽 세상, 곧 피안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의 공간에서, 블루가 밤의 상징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쾌락원칙을 넘어
최지영의 작품들은 프로이트주의자들이 보면 무릎을 칠 테마들로 뒤덮여 있다. 그들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최지영의 그림들은 죽음충동을 자극한다.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개념이기보다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인데, 생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불가능하지만 달콤한 꿈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가 그 테마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사실 작가들이 테마들을 너무 의식하면 별로 재미없다).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그림으로 대신 표현했다고 자주 말했다. 편안한 침대를 갖고 싶었고, 정갈한 욕조를 갖고 싶어서, 그림으로 대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죽음 보다는 오히려 세속의 에로스적인 욕망이 그림으로 표현됐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에로스적인 욕망은 그의 회화 수법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그림은 일반적인 회화 수법과는 다르다. 붓으로 ‘칠을 하며’ 형태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지워가며’ 형태를 드러낸다. 그의 독특한 회화수법을 알기 위해 다시 ‘침대’ 시리즈를 보자. 먼저 흰색 캔버스에 검정색(푸른 욕조의 경우는 푸른색)을 덧칠한다. 그리고는 침대의 형태에 따라 부분적으로 검정색을 지워낸다. 색을 모두 지워내면 바탕색인 흰색이 드러나고, 덜 지우면 세피아, 더욱 덜 지우면 좀 짙은 세피아가 드러난다. 검정색으로 덧칠해놓은 캔버스에서 그 검정색을 조금씩 지워가며 원했던 대상을 드러내는 식이다. 지워내기 전에 아무런 밑그림도 없이 눈대중만으로 침대를 만들어내고, 욕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회화 수법은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가 즐겨 했던 그라타주(grattage, 색을 두텁게 칠한 후 표면을 긁어내는 것), 프로타주(frottage, 요철이 있는 물체에 종이를 대고 색연필 따위를 문질러 형태를 만드는 것) 등과 유사한 것이다. ‘긁어대고’ ‘문지르는’ 가운데 의도했던 이미지를 완성하는 수법이다. 당시의 관습을 모두 파괴하고자 했던 에른스트는 이 수법을 성행위와 관련지어, 회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회화의 과정으로서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긁어대고 문지르며, 전통의 구속에서 에로스를 해방시키는 전복적 기쁨을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지영은 작품은 에른스트의 행위와 비슷한 듯 약간 다르다. 비슷한 점은 그 수법에 잠재돼 있는 에로스적인 무의식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대개 정물과 같은 사물에 한정돼 있는 점이 에른스트와 다르다. 에른스트의 작품에는 에로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최지영의 작품에는 에로스와 죽음이 참 기묘하게 혼합돼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가 그의 그림들을 본다면, “죽음은 에로스에 물들어 나타난다”는 자신의 명제를 되풀이 할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생명의 강렬한 은유처럼 보이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정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이 기묘하게 얽혀 있는 그의 그림들이 또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궁금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에로스의 찬양 쪽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바로크 화가들처럼 바니타스의 허무로 더욱 빠져들지, 아직은 단정하기 쉽지 않다. 아마 그 사이 어디쯤에서 당분간 방황할 것 같다. 그 방황의 흔적들은 지금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드러날 것이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기자 생활을 하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으로 유학, 영화학을 전공했다(1998~2004).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영화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관련 예술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됐다. 볼로냐 대학에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루키노 비스콘티의 멜로드라마 연구」로 학위(라우레아)를 취득했다. 2004년부터 『씨네21』에 ‘영화와 미술’을 연재하였고, 이는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2005), 『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2006) 2권으로 출간됐다. 번역서로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1995), 공저로는 『필름 셰익스피어』(2006)가 있다. 현재 『씨네21』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발표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출강 중이다. http://blog.naver.com/hans427
한겨레> 큐레이터 조선령의 상상공장_ 전혀 다른 세계
한겨레> 큐레이터 조선령의 상상공장_ 전혀 다른 세계
히치콕의 <사이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공포영화에는 욕실이 자주 나온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의식의 무장이 해제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욕조는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으며, 수도꼭지는 허공에 고정된 알 수 없는 도구처럼 보인다. 깊이나 원근감이 없는 푸른색은 욕조와 수도꼭지를 단일한 종류의 사물로 만들고 배경에 흡수시켜 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반대로, 푸른색의 형체 없는 세계가 먼저 있고 그것이 욕조와 수도꼭지를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것 같다. 최지영의 작품이 공포영화의 어떤 순간을 닮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지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령 백남준 아트센터 학예팀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67240.html
Book: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_ 탐미와 위반, 29인의 성좌_ 강수미 저, 현실문화연구 2009
강수미 저,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2009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몫을 하는 작가 29명의 미술(회화, 사진, 설치, 영상 작품 등)을 몸통 삼고, 예술가인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삶을 살아내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대지로 딛고, 비평가의 지각을 작은 스코프 삼아 쓴 책. ‘한국 현대미술’을 우리 현실의 맥락 속에서 미술비평과 미학을 통해 읽고자 했다.
서구 권위적 미술사가 정의한 명작이나 거장과는 거리를 둔, 역사적 정통성이나 천재성을 논하기에는 어딘가 넘치면서도 부족한 감이 있는 ‘지금 여기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현실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하늘 위에 미술가 29인과 그들의 미술로 이루어진 별자리가 그려진다. http://desumi.egloos.com/
Stage of Objects - Paintings by Choi Ji-Young Present Captivating Illusions _ Kang, Su-Mi (Aesthetics)
Stage of Objects - Paintings by Choi Ji-Young Present Captivating Illusions
Kang, Su-Mi (Aesthetics)
Scene 1:
In a deep space of darkness, where it feels like one would not be able to touch the bottom with his or her hand, electric lights with round shades dangle as they drip yellowish-brown light, sweet like flowing honey. The image, in utter silence, providing no hint of place or situation, floats above our senses like a scene from a play. The hero is the lamp, and the substance of the act is the objecthood, including the light floating lightly in the darkness. This "objecthood" does not simply mean the nature of an object, such as a lamp. As indicated by the German word ‘Sachlichkeit,’ it refers to the overall situation itself, in which peculiar materiality and atmosphere reveal themselves in a specific time and space. Thus, standing before the stage of images where objects self-sufficiently express themselves as a whole, we do not "see and understand," but become "enchanted." As you can read in the words I just wrote, the voice is not active but passive, and we are not the observer but the captivated. This is the power of Choi Ji-Young's paintings, and the mechanism of enjoyment compelled by those paintings.
Looking at an image and understanding it in the context of language at the same time is a vision-perception process we are comfortable with and enjoy (seeing is believing). For instance, this happens when you look at a picture and think "this is a painting of A, this is a painting of B, and so the artist is saying such and such" and when you are able to compose a certain visual narrative of the images. And in addition, you feel satisfied for seeing something significant. But sometimes, or in rare events, we are intrigued by images that cannot be composed into a logical narrative within the boundary of our own perceptions, or by those that carry no linguistic contents to speak of. For example, as I watch certain films directed by Wang Jiawei, which give a cool sensation of about 3 degrees below zero, and the flashy continuous movement of the image shots, I am willingly pulled into the objects in a state of "empty-brained muteness." Of course even in those moments, the fragments of words and the splintered imaginative signs of language may float above my mind and tongue, but in the moment I am captivated I feel like my body is made up of just "eyes and flesh."
Someone may say that Lamps by Choi Ji-Young, which I described in words in the beginning of this paper, is literally a painting of lamps, and therefore we spectators are able to perceive them as lamps. Moreover, since her works are just stationery images painted on rectangular picture-planes, they might say that they are not comparable to the absorbing power of movie images, which create movement in continuous cuts and shots. This is true. However, I am not talking about the fragmental facts of the object (Choi's paintings), but the special intensity of the objects. From this perspective, perception at the level of knowing the names of the objects painted can hardly be called a process of thought, and the division of genre such as film or painting also seems meaningless.
Hence, the key point does not lie in whether a noticeable motive is realistically represented or not in Choi's painting. On the contrary, the question is whether the representation-contents in the painting leads us to additional thought or brings us to a stop at the point we were fascinated. Where does that stopping force come from and how strong is it?
Looking at an image and understanding it in the context of language at the same time is a vision-perception process we are comfortable with and enjoy (seeing is believing). For instance, this happens when you look at a picture and think "this is a painting of A, this is a painting of B, and so the artist is saying such and such" and when you are able to compose a certain visual narrative of the images. And in addition, you feel satisfied for seeing something significant. But sometimes, or in rare events, we are intrigued by images that cannot be composed into a logical narrative within the boundary of our own perceptions, or by those that carry no linguistic contents to speak of. For example, as I watch certain films directed by Wang Jiawei, which give a cool sensation of about 3 degrees below zero, and the flashy continuous movement of the image shots, I am willingly pulled into the objects in a state of "empty-brained muteness." Of course even in those moments, the fragments of words and the splintered imaginative signs of language may float above my mind and tongue, but in the moment I am captivated I feel like my body is made up of just "eyes and flesh."
Someone may say that Lamps by Choi Ji-Young, which I described in words in the beginning of this paper, is literally a painting of lamps, and therefore we spectators are able to perceive them as lamps. Moreover, since her works are just stationery images painted on rectangular picture-planes, they might say that they are not comparable to the absorbing power of movie images, which create movement in continuous cuts and shots. This is true. However, I am not talking about the fragmental facts of the object (Choi's paintings), but the special intensity of the objects. From this perspective, perception at the level of knowing the names of the objects painted can hardly be called a process of thought, and the division of genre such as film or painting also seems meaningless.
Hence, the key point does not lie in whether a noticeable motive is realistically represented or not in Choi's painting. On the contrary, the question is whether the representation-contents in the painting leads us to additional thought or brings us to a stop at the point we were fascinated. Where does that stopping force come from and how strong is it?
Scene 2:
Since when did cushions or pillows have such graceful bodies―those objects that lie around within the radius of our life getting kicked about under our feet? Do basins and bathtubs, which frequently take the dirt from my face and body, really emit such elegant chastity and noble sense of existence? Though Gothic candlesticks and rococo-style chandeliers are supposed to be tasteful and fancy, and capable of emitting refined or brilliant light, nevertheless, can just one of them create such a sacred atmosphere and seductive situation? The main characters-objects appearing in Choi Ji-Young's paintings are beautiful, elegant, pure and mysterious enough to make appreciators' ask such questions without being aware. In terms of art form, the objects are illusions that have gained unique bodies and atmosphere through a technique of applying a thick and evenly-spread out layer of abundant monotone oil paints, and then rubbing away the paint along the edges of the figure. But at the same time, from a psychological viewpoint, the objects are "the real," which fascinate us and test our desires as they exist as images. These are by no mean desires in the sense that we actually want the objects in the paintings, or that we want to own the painting, but the desires to escape from the state of self that is oppressed by consciousness and pursue a state of pleasure led by impulse. It is the desire to stay submerged in that unconscious and passive psychological state. At that point, conscious questions of the spectator on why the painting was painted under what theme, or what story or what thought it intends to provoke in us are silenced. The eyes of the spectator only indulge in going over the surface of the painting, shining with dark umber, cobalt blue and orange, and the images of cushions, pillows, bath tubs, chandeliers and other objects, which have risen from the erased layers of paint. Like when our hands stroke the arrogant grains of velvet and when they slip across the cool and smooth surface of ceramics, as if it were under the warm and deep light of a lamp, our eyes feel the paintings of Choi Ji-Young. This tactility, the sensuous fascination and satisfaction of desires is the reality of the objects being presented on the stage by Choi's paintings. This actuality as an image stops our thoughts such as "This is just a well-painted painting" or "There is no probability or narrative in this painting;" makes us slide off that realm of perception; and encourages us to be satisfied with the enjoyment of illusion. To put it easier, the power of Choi's paintings comes from the actual effect from the image satisfying our senses of desire, and that power activates a mechanism of enjoyment at a level strong enough to make us spectators let go of our "strings of thought" when we stand before the painting.
Outside the Scene:
Choi's paintings approach us very familiarly, even though each of them were painted newly by this young laboring artist. An exact comparison would prove them different, but they seem as if we saw them somewhere or experienced them sometime in some situation. For example, to me Curtain, which only shows a curtain draped in the right-hand corner of the picture-plane, and the horizontally long white empty bathtub painting, Bathtub, keep overlapping regardless of my will to remind me of J. L. David's Death of Marat. Some may recall G. Richter's by Candlelight, and others may think of F. Gonzáles-Torres's installation works as they look at the Lamps series. Perhaps with no relation to fine art, some may obtain the satisfaction looking at images of better quality then interior pictures from a women's magazine as they see the paintings, Bathroom or Bed. Maybe intoxicated under the enchanting light of the Lamps series, someone will remember the sentiment of a restless love affair under the cherry blossoms on a spring night. Though untangible by the hand and incomprehensible by the head, people remember images carved in their hearts. Thus, there is nothing special about the motives of Choi's paintings, and the atmosphere released by the paintings stimulate the cliches of our emotions. But I believe that these are the strengths of Choi Ji-Young's works. As I wrote earlier, the reason we willingly stop thinking and satisfy ourselves with the illusional enjoyment of images is because those images appeal to us and are acceptable to us. In that sense, conventional paintings and paintings that stimulate our conventional sensibilities are definitely different. Choi's paintings cleverly operate in the latter dimension. This is because her paintings have extracted the state of our trite senses from reality as if they were picking it out with tweezers and put them on the canvas surface.
But at the same time, I believe that the cliche effect and powerful appeal to the senses of spectators in Choi's paintings may become danger factors in the course of this artist's work. In my experience, it is a difficult task to extract and analyze the conventional models deeply set in our sensibilities. Furthermore, the process of generalizing and objectifying them to create a new work accompanies the risk of the work itself becoming a variation of a cliche. Moreover, because the sensuous enjoyment of spectators stands back-to-back with instant acceptance of art, which easily evaporates, it can always be replaced by more fascinating and expressive images. Such acceptance will turn the significance of previously appreciated works into something meaningless. In this context, the current state of Choi's paintings, and the force of the images appear perilous and limited.
In this text, I referred to Choi Ji-Young's paintings as a "stage of objects," but in fact to us humans, objects present themselves within the boundary of life. So when I say that the paintings of this artist put objects on the stage, it implies that her work is separated from life and living in reality. In other words, her paintings disconnect themselves from our dirty and wretched daily lives, and beautify events, situations, thoughts and experiences that occur in life to a great extent. In a sense, such disconnection and beautification are one of the uses of fine art, especially paintings. But, the instant the function of illusion stops in her art, should we not anticipate an area where the virtual does not demonstrate its effects? As we know that the time will come when the lights go off on the stage, and as we know there is a world going on outside the movie theater that cannot move only by sensibility.
-------------------------------------------------------------------------------------------------------------
사물의 무대 - 매혹적 환영을 상연하는 최지영의 그림들
사물의 무대 - 매혹적 환영을 상연하는 최지영의 그림들
강 수 미 (미학)
장면 2:
장면 밖에서:
Book: Blue ocean Blossom of youth 푸른 대양 청춘의 개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미학) 강수미 저, 2007
BOOK: 푸른 대양 청춘의 개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미학) 강수미 저 , M&K , 2007
23명의 국내 젊은 작가들의 감수성과 이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적 지점들을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으로 조명한다. 저자는 미술비평가 및 독립큐레이터 강수미 씨. 이들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세 과정으로 나누고, 세 미학적 요소를 결합하여, 각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기획자의 비평과 작가 인터뷰로 제시한다.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완전한 무명, 혹은 새파랗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본문에서 '젊은 작가들'로 정의된 이들은 실제 연령에 따라 묶인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작품이 현재 미술계에 전혀 또는 거의 선보인 적이 없고, 어떤 비평의 그물망에도 포섭되지 않았다는 기준에 따라 묶였다.
이들의 작품은 각기 자기 개인의 감수성과 사고방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한국사회의 문화경향, 동시대의 감각과 지각, 경험을 상이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판단. 그는 동시대 새로운 미술 세대의 감수성과 문화적 성향을 미학적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실제 미술계에 급격하게 위축된 비평적 담론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강수미 - 1969년에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 석사,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타인 없는 세상', '서울생활의 발견: 삶의 사각지대를 보라', '번역에 저항한다', '푸른 대양 - 청춘의 개화'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2007년 현재 홍익대 학부 및 대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성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며, 미술비평가 및 독립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서울생활의 발견>(공저), <서울생활의 재발견>(2004년 문화관광부 추천도서),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공저), <푸른 대양 - 청춘의 개화> 등이 있다. '번역에 저항한다' 전시 기획으로 2005년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관광부)을 수상한 바 있다. http://desumi.egloos.com/
빛의 형이상학을 파열하는 맹목적 시각_이선영 / 미술평론가
Review 출전 아트인 컬처 2008년 12월호 [2009.01]
빛의 형이상학을 파열하는 맹목적 시각 이선영 / 미술평론가
최지영 전 11.12-11.25 인사아트센터
정세라 전 11.12-11.25 이화익 갤러리
도윤희 전 11.14-2009. 1.18 몽인아트센터
거의 같은 시기에 열린 세 여성 화가의 전시회는 빛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매개로 하여 시각에 관한 기존의 관념에 반전을 꾀하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최지영은 침실이나 욕실 같은 사적인 공간을 내밀하게 비추는 고풍스런 조명기구를 그렸고, 정세라는 가로등 조명만이 춤을 추는 도심의 공원을 그렸으며, 도윤희는 풍경에 편재하는 빛과 어둠의 드라마를 표현하였다. 이들의 작품에서 빛은 실외의 것이든 실내의 것이든, 자연적이든 인공적인 연원을 가지든, 작품 고유의 분위기와 밀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빛이라는 중심 코드가 관통하는 이들의 작품에서 형이상학의 역사와 깊이 연루되어 있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의 이면이 들추어진다. H.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형이상학의 역사는 애초부터 더 이상 소재적인 맥락으로는 포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적절한 준거를 확보하기 위해 빛의 은유가 지니는 특징을 활용해왔다고 지적한다.
통일과 다양, 절대와 제약, 근원과 소산 등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모두 빛에서 한 가지 모델을 구했던 셈이다. 이러한 은유에 의하면 빛은 소비되면서도 줄지 않는다. 빛은 공간, 거리, 방향, 고요한 명상을 강조한다. 빛은 대가없는 증여이며 강제 없이 지배할 수 있는 계몽으로 정의된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이렇게 확립되어 있는 빛에 대한 문화적인 은유를 변형시킴으로서,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변모된 관점을 드러낸다. 먼저 최지영은 세심하게 연출된 실내의 장면을 보여준다. 갈색, 청색, 주황색 등의 색조로 한정된 배경에 침대, 의자, 티 테이블, 욕조 등이 누군가에게 호명되듯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흐트러진 침구나 물이 나오는 욕조에는 인간의 흔적이 있지만, 가구나 기구들은 일상의 그것, 그리고 개인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토대가 불분명하다. 그것들은 하나의 색채로 채워진 우주적 심연 속에 붕 떠있는 듯하며, 때로 사물은 단단한 경계를 잃고 안료로 흘러내리기도 한다. 최지영의 작품에서 빛의 근원을 예시하는 것은 고풍스런 샹들리에가 그려진 그림들이다.
작품 [blue bathroom]은 깊고 푸른 공간을 구획하는 그리드 같은 타일을 보여준다. 빛처럼 쏟아지는 물, 그리고 다른 욕조그림에 나타나는 바, 단색조를 배경으로 하는 금속성, 혹은 사기질의 욕조와 그 부속기구들은 신체를 강하게 떠올리면서 어디선가부터 연원하는 빛을 반사한다. 바깥으로 통하는 아무런 통로가 보이지 않는 최지영의 실내는 마치 플라톤이 비유한 동굴처럼, 고립과 유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어두운 장소는 플라톤이 의미한 바의, 동굴 바깥의 찬란한 진리로부터 배제된 속박의 공간이 아니라 바깥에 못지않은 내면의 빛으로 충만 된 곳이다. 전체 우주가 동굴로 변화됨으로서, 동굴은 재해석되는 것이다. ‘선(善)의 태양과 동굴의 불을 대립시키는 플라톤의 정식’(블루멘베르크)은 제거되었다. 최지영의 공간은 수도원의 골방처럼 거대 우주와 겹쳐지는 소우주가 된다. 그곳은 일상의 세계와 통하는 문이 닫혀지고, 주체가 은둔을 통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장소가 된다. 만물을 밝히는 자연의 빛이나 진리를 밝히는 초월적인 빛은 내면적인 빛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정세라는 야간의 공원을 그린다. 여기에도 인적은 없다. 그러나 빈 의자 같은 사물은 사람의 흔적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기괴하게 꼬리를 빼고 있는 인공 광원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눈이 내재해 있다. 시점은 마치 자신의 그림에 나오는 수족관으로 전치된 깊고 푸른 공간 속 해파리나 산란하는 빛의 입자들처럼 떠돈다. 유령처럼 떠다니는 시점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계단들과 끝없이 갈라지는 빛의 무리로 인해 분열증적인 어지러움을 자아낸다. 작품 [저 너머]처럼, 온통 노랑 물결로 출렁이는 공간은 실내인지, 실외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도심의 공원이 아닌, 유럽의 고성 내부를 그린 작품은 심해에 잠긴 듯한 유적지를 비추는 광원들로 시야가 출렁거린다. 인적 없는 도심의 야생적 장소, 깊고 푸른 고성이 등장하는 그림들은 사물의 윤곽을 흐리는 모호함과 맞물려 밤과 꿈에 경도되었던 낭만주의적 정서가 깔려 있다. 낭만주의는 ‘밤이 우리에게 열어준 무한한 시선’(노발리스)을 예찬한다. 밤을 비추는 빛은 낮을 비추는 빛과 달리, 사물들을 변형시키고 연결시킨다.
분열하며 변형되는 정세라의 빛은 공포와 황홀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것은 이성의 빛이라는 전통적 은유를 전도시킨다. 존 맥컴버는 [데리다와 시각의 폐쇄]에서 데리다를 인용하면서, 형이상학은 그 첫 번째 단어들을 말하기 시작 할 때부터 시각과 인식을 연관 시킨다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태양으로부터 데카르트의 명백성과 분명성(명석과 판명)을 거쳐 훗설의 관조의 제국주의와 최종적으로는 하이데거의 드러남의 빛에 이르기까지, 이 은유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철학사 전체를 하나의 광학과 비유했다. 그것은 또한 시각이 요구하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대상과 안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데아 같은 견고한 형식이 정립된다. 반복적으로 실행될 수 있어야만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증명)되는 관습도 시각성에 근거한 것이다. 빛은 근대에 와서도 우주적 보편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현대의 화가 정세라의 작품에서 대상을 국부적으로 조명(illuination)하는 계몽(enlightenment)의 빛은 미몽(迷夢)이 되었다. 보여져야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선별하는 체계적인 빛의 조작은 화가의 붓질에 의해 산산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오일과 연필로 형상을 그리고 그 위에 바니쉬를 칠하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탄생한 도윤희의 그림은 앞의 두 화가 같은 생경한 화려함은 없지만, 시각에 대한 또 다른 위반적 관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관점을 ‘눈이 없는 시선’이라고 말한다. 눈이 없는 시선이란 ‘환상, 기억, 현실을 접합시키는 기묘한 층위’이다. 타원형이 층층이 쌓인 구조는 마치 누워있는 산처럼 보이기도 하고, 빠른 속도에 의해 배경과 뒤섞어 뭉개진 형상은 마치 흘러가는 물이나 바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외적 연대는 내적 연대만큼 강하지 못하다. 도윤희의 작품에서 내적 연대가 이루어지는 때는 낮보다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의해 검은 그림자가 흩어지는 듯한 작품 [밤은 낮을 지운다], [고삐가 풀린 저녁], 그리고 어둠 위로 둥실 떠오르는 빛 입자들을 그린 작품 [새벽도 밤의 한 자락이다]가 그렇다. 빠르게 흘러가는 물이 연상되는 작품 [액체가 된 고민]은 속도감 있게 나타났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꿈결 같은 이미지이다.
잘 보기 위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역설을 택하는 도윤희는 작품 [보인다기 보다는 차라리 들리는]에서 세로로 세워 대칭형으로 배열한 작품을 통해, 풍경을 널리 퍼져나가는 반향으로 전치시켰다. 나머지 공간을 채우는 얼룩들은 시각(공간)을 청각(시간)의 차원으로 변주하면서 생겨난 낙진 같은 미묘한 형상을 이룬다. 이 작품이 걸린 공간 한켠에 마련된, 낡은 나무 책걸상이 놓여있고 알전구가 밝혀진 작은 방은 문학적 향취가 강한 그녀의 작품이 탄생하는 장소를 엿보게 해 준다. 작가는 회화를 ‘현재성을 영원의 이면으로 포착하는 것’, ‘침묵을 지키며 말하는 방식’, ‘단어가 없는 언어’, ‘손의 감각을 이용하는 글쓰기’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공간적인 범주를 시간적인 범주로 전환시키는 방식이다. 통상적으로 눈은 공간을 지배한다. 반면 소리는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며, 시각의 대상이 가지는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눈이 없는 시선’을 강조하는 도윤희의 작품에서 시각 또한 청각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인다.
존 맥컴버는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볼 수도 없고 형식도 없는 어떤 것이면서도 모든 것을 담고서 영원한 본질들을 생성의 유희로 끌어들이는 그 그릇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처럼, 우리는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사물이 존재하고 변화하며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서 그 그릇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들에 관한 시각은 우리가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시각으로 남아있다. 즉 우리의 시각은 맹목이다. 맹점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우리의 시계의 형태와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맹점 주변에서 조직되는 시각은 형식이 아니라 흔적이며, ‘시각성을 열면서 그것에 한계를 긋는, 그 보이지 않는 것’(데리다)이다. 자신의 맹점 주변에 조직된 시각을 통해, 대상이 떠오를 카오스적인 바탕 면을 형상화하는 이 세 여성 화가들의 작품에서, 시각적 대상은 더 이상 현전이 아니라 잠시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Tempting Objects and the Old Future_ 유혹하는 오브제와 오래된 미래_고충환 / 미술평론가
Tempting Objects and the Old Future
Kho, Chung-Hwan
Kho, Chung-Hwan
A fetish is a god in capitalism and commodities aesthetics explores this fetish. Traditionally, something sacred, unrealistic, invisible, spiritual, ontological, and even evocative of the life to come are included in the territory of god or aesthetics. They are all reflected onto commodities and fetishes. How does something that is nothing but a commodity have a spiritual aura, and what does that aura accurately mean? In capitalist society, commodities appeal to us and then rapidly fall impotent. Desires for commodities(aesthetics) surpass their utility(commodity’s own finality and functionality). Complete objects are thrown away without displaying their own usefulness. These discarded objects are reborn as ethereal icons, evoking previous reminiscences. An antique shop or a flea market is a grave of objects and an incubator that helps those things come to life again as true fetishes.
An arcade or a department store where modern style(minimalism) is combined with a classicism also a modern-version incubator, offering an optimal environment where objects are reborn as real icons. In the age of capitalism, commodities have an aesthetic objectivity rather than finality and functionality. As this aesthetic objectivity itself is not new and belongs to the past, all fresh, new things are hurriedly put into the past. By doing this, the new becomes the familiar, the surprising turns to the intimate, and the shocking changes into the friendly.
Here, Walter Benjamin extracts the paradox of old future. His assertion is that all new things stimulate our past memories and transform into aesthetic objects, thereby being reborn into the icons that stir up and satisfy our desire to possess the world. Like this, capitalism reorganizes the world’s enormous antique shops and flea markets and covers them with arcades and department stores. An art museum is also a kind of department store which metamorphoses commodities into icons. This capitalism invites us to an attractive, seductive, and interesting society inundated with all kinds of spectacles and tempting objects.
Choi Ji Young’s work featuring a bed, a sofa, a chair, a bathtub, a chandelier, an incandescent lamp, and a tea table makes the objects seem to be floating over the background, submerged in darkness. This evokes a psychological, internal, and implicative mood. The objects that appear in her paintings work as a substitute for personality and desire. The artist calls them ‘a made-up scene.' If so, what and how did she direct? As implied by the list of objects, her paintings remind viewers of a high-quality catalogue to advertise commodities. A style to conflate classicism with a modern quality makes antique furniture, a lamp set, a ceramic bathtub, and a faucet made of stainless steel stand out, raising their value as commodities.
As is widely known, such a fusion style originated from Mannerism and Baroque art, which pursued a special melding of hybrid elements. While Mannerism becomes a model of Surrealism by pursuing an aesthetic of the grotesque(ex. Arnold Hauser sees mannerism as a real momentum of contemporary art), Baroque art emphasizes ontological pathos through a melding of heterogeneous elements in stark contrast between light and darkness. The artificial light in Choi Ji Young’s paintings is surely an outgrowth of modernity, but the aesthetic sense here is originated from Baroque art. A psychological, internal, and mystic atmosphere in tune with light and darkness is a true legacy of Baroque art that is discovered in a group of Baroque masters, such as Georges de La Tour, Rembrandt, and Francisco Goya.
Is it possible to produce such an atmosphere in Choi’s pictures as is seen in paintings with Biblical themes, historical paintings, and self-portraits? Her paintings seem derived from this question and indicate an aspect that can be called a sort of ‘object portrait’. This conception, however, is not her own but has been already widely used in advertising materials meant to publicize a wide variety of commodities. Each image printed in a catalogue is a portrait of the object. The artist reproduces it in a painted version. We can discover the artist’s response to the capitalist desire(that is, the artist’s or our own desire) projected onto diverse commodities in the background of such images, and a perception of the relations between fetishistic commodities and artworks. Works of art in a capitalist society are fetishistic commodities and the art museum is a sanctuary where such fetishes dwell.
In ‘a made-up scene', the scene is the momentum that transforms objects into fetishes. The palette of her painting is restricted to several monotones, Such as black and white or blue and orange, thereby evoking a sense of puritanical abstinence and temperance which is congenial to bourgeois morals, Confucius ideology, and a Minimalist aesthetic sense. While a black and white scene(more accurately on a dark brown canvas) brings about ontological pathos as if facing darkness itself(a metaphor for an abyss), a bluish tone applied to the bathroom scenes provokes a sense of agreeable isolation along with a cold, dim feeling. This cozy feeling of solitude is likely to be a stylistic feature of the modern style.
In any painting the objects emerging from the darkness radiate an aura like sacred icons, revealing the sense of presence. This aura can be brought up by the adjustment of light and darkness. As if in an object play(a kind of psychological drama with the medium of fetishes in the capitalist age) this atmosphere evokes a sense of dramatic tension. Choi's paintings also arouse a sober atmosphere like a Vanitas painting depicting a still-life. We may sense from her painting a warm or cold-hearted tactile sensation.
In Choi's painting each object with a projected desire is reborn as a sacred being covered with the veil of aura woven with light and darkness. Just as the lighting makes the thingness of an object look conspicuous, the darkness in a picture is exploited to make objects look more splendid. As if silence sometimes makes words shining, darkness makes objects look brighter. Some Romanticism is sensed in such objects shrouded by aura, scared things, and tempting objects, exuding the taste of antiques, which is often interpreted as a bourgeois ideology to take up with aristocratic taste. This taste was in it's apex in the age of Romanticism. So-called paradox of old future that spurs up past reminiscence by putting all fresh into the past is positioned in its behind. Choi Ji Young's work recalls this paradox.
유혹하는 오브제와 오래된 미래
고충환 / 미술평론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자본주의의 신은 물신이며, 그 물신을 조망한 것이 상품미학이다. 전통적으로 신과 미학의 고유영역에 속해져 있던 것들, 이를테면 신성한 것들, 비현실적인 것들, 비물질적인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 정신적인 것들, 존재론적인 것들, 심지어는 내세를 환기시켜주는 것들 일체가 고스란히 상품에 투사되고 물신에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갓 상품이 어떻게 이렇듯 정신적인 아우라를 뒤집어쓰게 되었으며, 또한 이때의 아우라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물질적 광휘로 빛을 발하는 물질이란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자본주의는 상품에 대한 즉각적인 어필과 함께, 일단 어필된 연후에는 상품의 재빠른 노화를 요구한다. 상품에 대한 욕망(미학)이 상품의 효용성(상품 고유의 목적성과 기능성)을 앞질러야 한다. 이렇게 멀쩡한 사물들이 고유의 목적성과 기능성을 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버려진다. 이렇게 버려진 사물들은 또 다른 욕망, 이를테면 향수를 자극하는 욕망을 덧입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물신으로 거듭난다. 해서, 골동품 상가와 벼룩시장은 사물들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물들이 진정한 물신으로 거듭나는 인큐베이터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모던 스타일(미니멀리즘)과 클래식(고전주의 양식)이 결합된 아케이드와 백화점은 이처럼 상품이 물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춘 현대판 인큐베이터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상품은 이렇듯 기능과 목적성으로서보다는 심미적 대상성을 내재함으로써 그 진정한 존재의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이때의 심미적 대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에 속한 것(향수를 자극하는 것)인 만큼 모든 새로운 것들을 서둘러 과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렇게 새로운 것은 익숙한 것이 되고, 놀라운 것은 친근한 것이 되고, 충격적인 것은 우호적인 것으로 변질된다.
이로부터 발터 벤야민은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을 도출해낸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서둘러 향수를 자극하는 심미적 대상으로 변환되어져야 하며, 이로써 세계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켜주는 물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세계를 거대한 골동품 상가와 벼룩시장으로 재편하고, 아케이드와 백화점으로 뒤덮는다. 미술관 역시 작품(상품)을 물신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백화점의 또 다른 한 유형이라는 사실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로써 온갖 유혹하는 오브제들로 넘쳐나는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의 사회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다.
최지영의 그림에 등장하는 침대, 소파, 배게, 의자, 욕조, 샹들리에, 백열등, 티 테이블 등의 사물들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배경화면으로부터 표면 위로 떠오르는 듯, 부유하는 듯 그려져 있어서 심리적이고 내면적이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로써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사물 자체로서보다는 마치 사물극에서와 같은 인격의, 욕망의 대리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테마로 한 그림이나 역사화 그리고 자화상과 같은 장르화 외에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한갓 사물에도 이런 분위기나 연출이 가능할까. 작가의 그림은 적어도 이런 문제의식에 자극받은 것처럼 보이며, 그런 만큼 이를 통해 일종의 사물 초상화라고 부를 만한 한 경향성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그 발상 자체는 유독 작가의 전유물이라기보다는, 기실 각종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광고 메커니즘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카탈로그에 실린 사물의 이미지 하나하나는 그대로 그 사물들의 초상화에 해당하며, 작가는 다만 이를 회화의 버전으로 재생한 것이다. 그 이면에서 각종 상품에 투사된 자본주의의 욕망(작가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욕망이기도 한)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 읽혀지며, 페티시 즉 물신화된 상품과 작품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자본주의 시대의 예술작품은 공공연하게는 물신화된 상품이며, 미술관은 그 물신들이 거하는 성전이다)이 읽혀진다.
이로써 <연출된 장면>에서의 장면은 곧 사물을 물신으로 탈바꿈시켜주는 계기로서의 장면임이 드러난다. 이를 위해 작가는 화면의 색상을 흑과 백, 아니면 청색이나 오렌지 색조의 모노톤으로 한정하는데, 이로부터 청교도주의(그 자체 부르주아의 도덕률이나 유교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미의식과도 통하는)에 바탕을 둔 금욕과 절제의 미덕을 불러일으킨다. 이 가운데 흑과 백의 화면(정확하게는 짙은 갈색조의 화면)이 어둠 자체(심연의 메타포)와 직면하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파토스를 자아낸다면, 주로 욕실 정경에 적용된 청색 조의 화면에서는 쾌적한 고립감과 함께 차갑고 아득한 느낌이 감지된다(이처럼 차갑고 아득한 느낌이 주는 안온한 고립감이야말로 모던 스타일의 양식적 특징이 아닐까). 어느 경우이건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사물들이 신성한 아이콘과도 같은 아우라(일종의 영기와도 같은)를 발하면서 사물 이상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아우라는 빛과 어둠과의 긴밀한 조율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양상 여하에 따라서 그림은 사물극(그 자체를 페티시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시대의 심리극의 한 경우로 볼 수 있는)에서와 같은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바니타스 정물화의 또 다른 한 버전과 대면하는 것과 같은 숙연함을 자아내기도 하고, 시각 현상을 넘어 따뜻하거나 차가운 촉감이 감지되기도 한다.
최지영의 그림에 등장하는 침대, 소파, 배게, 의자, 욕조, 샹들리에, 백열등, 티 테이블 등의 사물들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배경화면으로부터 표면 위로 떠오르는 듯, 부유하는 듯 그려져 있어서 심리적이고 내면적이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로써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사물 자체로서보다는 마치 사물극에서와 같은 인격의, 욕망의 대리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사물들을 그린 이 일련의 그림들을 <연출된 장면>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연출하고 있는가. 사물들을 열거한 리스트에서도 암시되듯 작가의 그림은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고급 양장본의 카탈로그를 연상시킨다. 고전주의와 모던 스타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일종의 퓨전 양식이 앤틱 가구와 전등세트, 그리고 도자기로 만든 욕조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수도꼭지를 돋보이게 하며, 그 상품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퓨전 스타일의 원조는 매너리즘과 연이은 바로크 미술이다. 여기서 매너리즘이나 바로크 미술이 하나같이 퓨전 스타일 고유의 이질적인 양식의 혼용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매너리즘이 그로테스크 미학을 지향함으로써 초현실주의의 전범이 되고 있다면(아놀드 하우저가 매너리즘을 현대미술의 진정한 계기로 본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크 미술은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 속에다 이질적인 양식을 버무려 존재론적인 파토스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로써 특히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각종 전등이 발하는 인공불빛 자체는 현대의 산물이지만, 적어도 이때 작용하는 미의식만큼은 바로크에 연유한 것이다. 빛과 어둠의 조율이 만들어내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야말로 바로크 미술의 진정한 유산이며, 이는 그대로 조르주 드 라투르나 렘브란트 그리고 프랜시스 고야 등의 일군의 바로크 미술의 거장들에게서 확인되는 바와 같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