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출전 아트인 컬처 2008년 12월호 [2009.01]
빛의 형이상학을 파열하는 맹목적 시각 이선영 / 미술평론가
최지영 전 11.12-11.25 인사아트센터
정세라 전 11.12-11.25 이화익 갤러리
도윤희 전 11.14-2009. 1.18 몽인아트센터
거의 같은 시기에 열린 세 여성 화가의 전시회는 빛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매개로 하여 시각에 관한 기존의 관념에 반전을 꾀하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최지영은 침실이나 욕실 같은 사적인 공간을 내밀하게 비추는 고풍스런 조명기구를 그렸고, 정세라는 가로등 조명만이 춤을 추는 도심의 공원을 그렸으며, 도윤희는 풍경에 편재하는 빛과 어둠의 드라마를 표현하였다. 이들의 작품에서 빛은 실외의 것이든 실내의 것이든, 자연적이든 인공적인 연원을 가지든, 작품 고유의 분위기와 밀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빛이라는 중심 코드가 관통하는 이들의 작품에서 형이상학의 역사와 깊이 연루되어 있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의 이면이 들추어진다. H.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형이상학의 역사는 애초부터 더 이상 소재적인 맥락으로는 포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적절한 준거를 확보하기 위해 빛의 은유가 지니는 특징을 활용해왔다고 지적한다.
통일과 다양, 절대와 제약, 근원과 소산 등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모두 빛에서 한 가지 모델을 구했던 셈이다. 이러한 은유에 의하면 빛은 소비되면서도 줄지 않는다. 빛은 공간, 거리, 방향, 고요한 명상을 강조한다. 빛은 대가없는 증여이며 강제 없이 지배할 수 있는 계몽으로 정의된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이렇게 확립되어 있는 빛에 대한 문화적인 은유를 변형시킴으로서,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변모된 관점을 드러낸다. 먼저 최지영은 세심하게 연출된 실내의 장면을 보여준다. 갈색, 청색, 주황색 등의 색조로 한정된 배경에 침대, 의자, 티 테이블, 욕조 등이 누군가에게 호명되듯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흐트러진 침구나 물이 나오는 욕조에는 인간의 흔적이 있지만, 가구나 기구들은 일상의 그것, 그리고 개인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토대가 불분명하다. 그것들은 하나의 색채로 채워진 우주적 심연 속에 붕 떠있는 듯하며, 때로 사물은 단단한 경계를 잃고 안료로 흘러내리기도 한다. 최지영의 작품에서 빛의 근원을 예시하는 것은 고풍스런 샹들리에가 그려진 그림들이다.
작품 [blue bathroom]은 깊고 푸른 공간을 구획하는 그리드 같은 타일을 보여준다. 빛처럼 쏟아지는 물, 그리고 다른 욕조그림에 나타나는 바, 단색조를 배경으로 하는 금속성, 혹은 사기질의 욕조와 그 부속기구들은 신체를 강하게 떠올리면서 어디선가부터 연원하는 빛을 반사한다. 바깥으로 통하는 아무런 통로가 보이지 않는 최지영의 실내는 마치 플라톤이 비유한 동굴처럼, 고립과 유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어두운 장소는 플라톤이 의미한 바의, 동굴 바깥의 찬란한 진리로부터 배제된 속박의 공간이 아니라 바깥에 못지않은 내면의 빛으로 충만 된 곳이다. 전체 우주가 동굴로 변화됨으로서, 동굴은 재해석되는 것이다. ‘선(善)의 태양과 동굴의 불을 대립시키는 플라톤의 정식’(블루멘베르크)은 제거되었다. 최지영의 공간은 수도원의 골방처럼 거대 우주와 겹쳐지는 소우주가 된다. 그곳은 일상의 세계와 통하는 문이 닫혀지고, 주체가 은둔을 통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장소가 된다. 만물을 밝히는 자연의 빛이나 진리를 밝히는 초월적인 빛은 내면적인 빛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정세라는 야간의 공원을 그린다. 여기에도 인적은 없다. 그러나 빈 의자 같은 사물은 사람의 흔적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기괴하게 꼬리를 빼고 있는 인공 광원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눈이 내재해 있다. 시점은 마치 자신의 그림에 나오는 수족관으로 전치된 깊고 푸른 공간 속 해파리나 산란하는 빛의 입자들처럼 떠돈다. 유령처럼 떠다니는 시점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계단들과 끝없이 갈라지는 빛의 무리로 인해 분열증적인 어지러움을 자아낸다. 작품 [저 너머]처럼, 온통 노랑 물결로 출렁이는 공간은 실내인지, 실외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도심의 공원이 아닌, 유럽의 고성 내부를 그린 작품은 심해에 잠긴 듯한 유적지를 비추는 광원들로 시야가 출렁거린다. 인적 없는 도심의 야생적 장소, 깊고 푸른 고성이 등장하는 그림들은 사물의 윤곽을 흐리는 모호함과 맞물려 밤과 꿈에 경도되었던 낭만주의적 정서가 깔려 있다. 낭만주의는 ‘밤이 우리에게 열어준 무한한 시선’(노발리스)을 예찬한다. 밤을 비추는 빛은 낮을 비추는 빛과 달리, 사물들을 변형시키고 연결시킨다.
분열하며 변형되는 정세라의 빛은 공포와 황홀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것은 이성의 빛이라는 전통적 은유를 전도시킨다. 존 맥컴버는 [데리다와 시각의 폐쇄]에서 데리다를 인용하면서, 형이상학은 그 첫 번째 단어들을 말하기 시작 할 때부터 시각과 인식을 연관 시킨다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태양으로부터 데카르트의 명백성과 분명성(명석과 판명)을 거쳐 훗설의 관조의 제국주의와 최종적으로는 하이데거의 드러남의 빛에 이르기까지, 이 은유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철학사 전체를 하나의 광학과 비유했다. 그것은 또한 시각이 요구하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대상과 안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데아 같은 견고한 형식이 정립된다. 반복적으로 실행될 수 있어야만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증명)되는 관습도 시각성에 근거한 것이다. 빛은 근대에 와서도 우주적 보편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현대의 화가 정세라의 작품에서 대상을 국부적으로 조명(illuination)하는 계몽(enlightenment)의 빛은 미몽(迷夢)이 되었다. 보여져야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선별하는 체계적인 빛의 조작은 화가의 붓질에 의해 산산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오일과 연필로 형상을 그리고 그 위에 바니쉬를 칠하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탄생한 도윤희의 그림은 앞의 두 화가 같은 생경한 화려함은 없지만, 시각에 대한 또 다른 위반적 관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관점을 ‘눈이 없는 시선’이라고 말한다. 눈이 없는 시선이란 ‘환상, 기억, 현실을 접합시키는 기묘한 층위’이다. 타원형이 층층이 쌓인 구조는 마치 누워있는 산처럼 보이기도 하고, 빠른 속도에 의해 배경과 뒤섞어 뭉개진 형상은 마치 흘러가는 물이나 바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외적 연대는 내적 연대만큼 강하지 못하다. 도윤희의 작품에서 내적 연대가 이루어지는 때는 낮보다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의해 검은 그림자가 흩어지는 듯한 작품 [밤은 낮을 지운다], [고삐가 풀린 저녁], 그리고 어둠 위로 둥실 떠오르는 빛 입자들을 그린 작품 [새벽도 밤의 한 자락이다]가 그렇다. 빠르게 흘러가는 물이 연상되는 작품 [액체가 된 고민]은 속도감 있게 나타났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꿈결 같은 이미지이다.
잘 보기 위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역설을 택하는 도윤희는 작품 [보인다기 보다는 차라리 들리는]에서 세로로 세워 대칭형으로 배열한 작품을 통해, 풍경을 널리 퍼져나가는 반향으로 전치시켰다. 나머지 공간을 채우는 얼룩들은 시각(공간)을 청각(시간)의 차원으로 변주하면서 생겨난 낙진 같은 미묘한 형상을 이룬다. 이 작품이 걸린 공간 한켠에 마련된, 낡은 나무 책걸상이 놓여있고 알전구가 밝혀진 작은 방은 문학적 향취가 강한 그녀의 작품이 탄생하는 장소를 엿보게 해 준다. 작가는 회화를 ‘현재성을 영원의 이면으로 포착하는 것’, ‘침묵을 지키며 말하는 방식’, ‘단어가 없는 언어’, ‘손의 감각을 이용하는 글쓰기’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공간적인 범주를 시간적인 범주로 전환시키는 방식이다. 통상적으로 눈은 공간을 지배한다. 반면 소리는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며, 시각의 대상이 가지는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눈이 없는 시선’을 강조하는 도윤희의 작품에서 시각 또한 청각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인다.
존 맥컴버는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볼 수도 없고 형식도 없는 어떤 것이면서도 모든 것을 담고서 영원한 본질들을 생성의 유희로 끌어들이는 그 그릇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처럼, 우리는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사물이 존재하고 변화하며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서 그 그릇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들에 관한 시각은 우리가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시각으로 남아있다. 즉 우리의 시각은 맹목이다. 맹점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우리의 시계의 형태와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맹점 주변에서 조직되는 시각은 형식이 아니라 흔적이며, ‘시각성을 열면서 그것에 한계를 긋는, 그 보이지 않는 것’(데리다)이다. 자신의 맹점 주변에 조직된 시각을 통해, 대상이 떠오를 카오스적인 바탕 면을 형상화하는 이 세 여성 화가들의 작품에서, 시각적 대상은 더 이상 현전이 아니라 잠시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